신라의 골품 제도(신분 제도)

 

삼국 시대에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확실하게 나뉜 사회였습니다. 크게 귀족, 평민, 천민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계급에 따라 거주하는 집도 입는 옷도 달라야 했습니다.

 

이런 신분 제도는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의 대혁명이 발생했던 프랑스에도 신분에 따른 차별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습니다.

태양의 왕으로 불리던 루이 14세(태양의 왕)는 심지어 이런 칙령도 내렸습니다. 오직 귀족만이 빨간색 하이힐을 신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초상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과 다르게 남자들이 하이힐을 신고 다녔습니다. 

<루이 14세의 초상>, Hyacinthe Rigaud, 1659-1743, 파리  루브르 박물관

다시 신라로 돌아와서 왕족과 귀족들이 가장 높은 계급이고 그들이 나라의 전반적인 것을 운영했습니다. 당연히 지배 계층이니 다양한 특권과 물질적으로 풍요할 수 있었습니다. 좋은 집과 많은 시종을 거느리고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평민들은 대부분 농민들이었고, 세금을 내며 살았습니다. 또한 성곽이나 궁궐을 쌓을 때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천민에 비하면 조금이라도 숨을 쉴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천민의 대부분은 노비였고, 그들은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빚을 갚지 못해 노비로 전략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마치 물건처럼 사고 팔렸습니다. 만약 당시에 소와 노비가 물에 빠졌다면 당연히 소를 구했을 겁니다.

 

그런데 만일 박명수 씨가 신라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떤 신분이었을까요?

박명수 씨는 밀양 박씨로 알려졌는데요. 박혁거세를 시조로 하기에 진짜 성골의 후손입니다. 즉 왕이 될 수도 있는 신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신라에는 골품 제도라는 특유의 신분 제도가 있었습니다.

 

신라 골품 제도 단계

 

신라의 골품 제도

골품이란 왕족을 뜻하는 '골'과 왕족이 아닌 사람을 뜻하는 '품'을 합쳐서 부르는 말입니다. 왕족은 성골과 진골로 나누고, 그 이외의 사람은 6두품에서 1두품까지 구분했습니다. 

 

이런 골품은 자손에게도 세습이 되었고, 두품에 따라 올라갈 수 있는 관직이 나뉘었습니다. 즉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즉, 아무리 김유신이라도 만약 3두품의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었을 겁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을 목을 쳤던 김유신이지만 그의 출생 신분이 낮았다면 말은 고사하고 말을 끌어야 했던 노비였을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신라와 같은 골품 제도는 없지만, 그와 같은 한계점들이 형성되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금수저', '흙수저', '범털', '개털' 등등 부모님을 잘 만난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사회 진출에 유리한 고지에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 계층 사다리를 뛰어넘기가 어렵게 되어 스스로를 비하하는 용어들입니다.

 

직장 안에서도 이런 구분이 정해져 있는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이 그것입니다. 미생이라는 드라마로 이런 갈등과 아픔을 잘 표현했지만 아직도 변화된 것은 별로 없습니다. 

 

아무튼 신라에서 자신의 신분에 따라 올라갈 수 있는 관직은 최고 단계가 정해져 있고, 심지어 사는 집의 크기와 장식, 옷과 수레까지도 차별이 생겼습니다. 과연 이런 사회가 온전한 국가를 이룰 수 있을까요?

 

그래서 국가들은 계층 간의 차이가 발생하지 않도록 여러 정책들을 만들고 노력하지만... 언제나 카르텔이 형성되기에 갈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인간의 욕심과 야망은 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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