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미술 양식



이집트 미술의 특징은 영원한 본질을 표현하기 위한 엄격한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건축과 조각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특별히 영원불멸을 표현하기 위해 돌은 없어서는 안될 재료였다.


미술가는 어떤 인간의 삶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장면을 표현한다.


당시 이집트는 인간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생각했으며 사후에도 육체는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별히 왕의 시신은 미이라로 제작되었으며, 미이라의 완성도는 무척이나 높았다.


미이라와 함께 분묘건축도 발전하게 되는데 분묘는 사후 생활의 거처이자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을 보관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집트의 분묘에는 많은 보물들이 함께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왕들의 영원을 상징하는 초상 조각을 만들게 된다.


이집트는 초상 조각의 기원이라 할 수 있으며, 이후 로마에서 초상 조각은 하나의 장식물로 자리를 잡는다.


<석회석 두상>

석회석 두상왕과 닮은 형상을 보존하도록 조각가에게 단단하고 영원 불멸을 상징하는 화강암에 왕의 두상을 조각하게 함.

<석회석 두상> BC. 2551-2528년경, 높이 27.8cm, 빈 미술사 박물관. 


<피라미드>

피라미드

피라미드는 영혼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형상화 한 것으로 미이라 보존과 함께 태양신 숭배를 기초로 하고 있다.

쿠프(B.C 2530)왕의 피라미드, 카프레(B.C 2500)왕의 피라미드, 멤카우레(B.C 2460)왕의 피라미드 유명하다.


<스핑크스>

스핑크스<스핑크스>, B.C 2530-2500.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뚱이에 사람의 머리를 붙인 동물로 왕권의 상징, 선한 자의 보호신 역할을 하였다. 

가장 오래되고 최대의 것은 이집트 제3왕조 카프라왕의 피라미드에 부설되어 있고, 길이 80m에 달하여 이것이 신왕국시대에는 하르마키스 신(지평선상의 호루스)으로서 숭배되었다. 카르나크 신전 등의 참도(參道) 양측의 스핑크스는 아몬 신의 신수(神獸)인 양의 머리를 붙여 ‘두 개의 지평선(영토)’의 수호신으로 하였다. 그리스 신화의 스핑크스와는 다르다.


기원전 530년 전에 만들어진 스핑크스 석상 (그리스 아티카)그리스의 스핑크스는 사악한 여성 괴물이었다. 상반신은 여자이고 하반신은 독수리 날개가 있는 사자의 모습이었다. 그리스어 스핑크스(Σφίγξ)는 ‘교살자,’ 다시 말해 '목을 졸라 죽이는 자'라는 뜻이었다. 전설에 다르면 욕정 때문에 미소년을 범했던 테베 왕 라이오스를 벌하기 위해 헤라가 보낸 괴물이라고 한다. 이 스핑크스는 테베 땅을 황폐하게 하고 주민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지나가는 길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문제를 내는데 맞추지 못하면 잡아먹었던 괴물로도 유명하다.


출처:위키백과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대리석상<스핑크스의 수수께끼>대리석상.




<라호테프 왕자와 부인 노페르트> - 고대 이집트 고왕국 시대 제 4왕조  

라호테프 왕자와 부인 노페르트<라호테프 왕자와 부인 노페르트>, B.C 2600경,석회암 채색,높이 120cm,118cm



<아크나톤왕과 부인 네페르티티 초상>

아크나톤왕과 부인 네페르티티 초상<아크나톤왕과 부인 네페르티티 초상>, 채색 석회암 2인상, 파리 루브르 박물관 - 이 작품은 엘 아마르나의 개인 주택 예배당에서 발견되었다. 아크나톤과 그의 아내 네페르티티가 매우 자연스럽게 조각되었다. 공간은 느슨하게 다루어졌으며, 두 인물은 서로 손을 잡아 조용한 친밀감을 표현하였다.



네피르티티 왕비(Queen Nefertiti)<네페르티티 초상>, 석회암 흉상, 베를린 국립 박물관.-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이집트 미술의 전통적인 부동성을 부드럽게 변화시켜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 특징인 아톤 양식의 걸작 중 하나이다. 이 작품에는 윤곽뿐만 아니라 조각적인 형상 역시 더욱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어서 독특한 형태감을 보인다.



<투탕 카멘 왕> 

투탕 카멘 왕<투탕 카멘 왕>, B.C 1330년경, 카이로 미술관.



투탕카멘의 묘지 입구에 “잠자는 왕을 방해하는 자에게는 죽음의 날개가 스치리라”는 경고가 새겨져 있다. 이 왕릉의 발굴 이후 카나몬 경은 5개월 후에 모기에 물려 사망했으며, 그 후 6개월이 지나서 동생 허버트 대령마저 죽었으며,뒤이어 카나몬 경의 간호를 맡은 간호사도 사망한다. 그 이외에도 카터의 비서도 죽는 등 발굴과 관련된 총 사망자가 20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집트인들은 이를 두고 ‘파라오의 저주’라고 말하고 있단다


1922년 11월 4일 투탕카멘의 왕의 무덤을 발굴했다.

계곡 밑에선 밀폐된 무덤의 출입구로 이어지는 바위 층계를 발견한 것이다.

카터는 매장실 주위의 한 밀폐된 방에서 파라오의 미라를 발견했는데 세개의 외부 관 안에 매장된 이후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순금으로 만든 내부 관이 있었다.

사진에서 카터는 가장 안쪽 관에 부은 굳은 송진을 조심스럽게 벗겨내고 있다.

미라의 팔은 갈고리 모양의 왕홀과 회초리를 쥔 채 십자로 엇갈려있고 황금 데스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파이앙스 도자기, 유리, 홍옥수, 청금석 등으로 세공된 마스크에는 석영과 흑요석으로 만든 살아있는 듯한 눈동자가 박혀 있었다.

이 화려한 마스크 뒷면에는 <사자의 서>의 본문이 새겨져 있다.


투탕카멘 왕묘를 발굴할 때는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카터가 키우던 애완새 카나리아가 코브라에게 먹히자 발굴 인부들은 발굴작업에 불길한 징조라고 두려워 하였다.

코브라는 이집트 왕의 머리를 장식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발굴이 진행되던 1923년 카나본 경이 사망하자 투탕카멘왕의 저주를 받아 사망하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후 6년에 걸쳐 발굴작업이 계속진행되었고 이집트학에 풍부하고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투탕카멘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보물들을 원래 모습 그대로 볼 수 있는것은 카터가 발견했기 때문이다.

카터는 투탕카멘왕묘의 발굴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발굴작업을 하지 않았으며 1932년 영국으로 돌아갔다.영국에 돌아가서도 강연등으로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했으며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1939년 65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학문적인 연구가 끝나면 파라오는 그의 묘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는 카터의 희망대로 투탕카멘은 현재 자신의 묘에서 관광객에게 전시되고 있다.


자료 출처 : 엔조이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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